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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마요네즈』로 제2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작가 전혜성의 두번째 장편소설. 한 편의 희곡 작품을 둘러싸고 각기 다른 나이와 역사와 욕망과 열정을 지닌 세 여성-연출가, 기획자, 배우-이 서로 관계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무대라는 가상 현실 속에 각자가 지닌 나름대로의 트라우마를 넘어서려는 꿈과 의지를 저도 모르게 투사시키려는 갈등 속에서, 독특한 개성이 살아 숨쉬는 인물의 창조적인 캐릭터와 유려하고도 성찰적인 재기어린 문장들, 곳곳의 재미있는 장면들과 반전이 실험적 작가 정신과 함께 작품을 극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만들고 있다.

1997년 [마요네즈]로 제2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작가 전혜성의 새 장편소설 [트루스의 젖가슴]이 출간되었다. 전혜성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트루스의 젖가슴]은 한 편의 희곡 작품을 둘러싼 세 여성, 즉 연출가, 기획자, 배우, 각기 다른 나이와 역사와 욕망과 열정을 가진 그녀들이 서로 관계를 이루어 가며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트루스의 젖가슴]은, 연극화 영화화되어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던 전작 [마요네즈]가 한국 문학사에서 새로운 형태의 어머니상을 창조했다는 호평을 받았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작품이며, 아울러 그 전작을 훨씬 뛰어넘는 탁월한 필력과 구성력을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트루스의 젖가슴]이 '주제에 대한 진지성과 연극 현장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뛰어나다'는 심사평을 받으면서 올해 대산창작기금을 수혜받았다는 사실에서도 5년이라는 긴 공백 기간이 전혜성에게 치열한 각고의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트루스의 젖가슴]에 등장하는 희곡 '트루스의 젖가슴'은 '소저너 트루스'라는 실존 인물의 구술 자서전인 [소저너 트루스의 이야기](1850)에 담긴 내용 중 일부를 작가 전혜성이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희곡이다. 소설 [트루스의 젖가슴] 안에 이 희곡의 작가로 설정된 '조안 첸' 역시 가상의 작가이다. 이 가상의 희곡 '트루스의 젖가슴'을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가 소설 [트루스의 젖가슴]이다. 실존 인물인 소저너 트루스는 19세기 미국에 살았던 노예 출신의 흑인 여성 인권 운동가로, '이사벨라'라는 이름으로 지냈던 노예 시절, '백인들에게 맞서는 짓'을 서슴지 않았고 앨라배마로 불법 매매된 아들을 법정 소송으로 되찾아 냈다. 당시의 흑인이라면 그 누구도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이 위험천만한 일련의 싸움을 겪어 낸 이후로 그녀는 이사벨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진리를 전하고 다니는 사람)'로 바꾸고 인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소설 [트루스의 젖가슴]이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은 소저너 트루스라는 인물이나 '트루스의 젖가슴'이라는 연극이 아니라 이 인물, 이 연극을 둘러싼 현재 시점의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자신의 역사를 얽히고설킨 가운데서 풀어 가는 과정이다. 하나의 연극을 상연하기 위해 부푼 꿈을 안고 모인 세 여자들이 무대라는 가상의 현실 속에, 자기가 지니고 있던 나름대로의 트라우마를 넘어서려는 꿈과 의지를 저도 모르게 투사시켜 가는 과정인 것이다. 독특한 개성이 살아 숨쉬는 인물들 각각의 창조적인 캐릭터와, 작가의 발랄한 재기가 꿈틀거리는 유려하고도 성찰적인 문장들, 곳곳에 펼쳐지는 재미있는 장면들과 놀라운 반전은, 실험적인 작가 정신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을 보다 극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만들고 있다. 아울러 여성 예술가들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려 낸 본격 예술가 소설이기도 하다.

줄거리
예국희가 이끄는 '가이아'는 아버지 예진호가 이끌던 극단 '만선'을 개명하여 잇게 된 극단이다. 그녀는 모노드라마 '트루스의 젖가슴'의 각본을 들고 워크숍 단원이었던 이실을 찾아가 연출을 제의한다. 이실은 3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다고 할 수 있는 극단 고도가 해체된 직후였다. 조이 첸이라는 작가가 쓴 '트루스의 젖가슴'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에 걸쳐 살았던 흑인 노예 여자 소저너 트루스의 이야기로 실존 인물의 삶을 모노드라마로 엮은 것이다. 여성의 영성, 파워, 자유와 존엄을 드러내는 이 작품의 주인공 소저너 트루스는 역사상 가장 힘있는 여성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이사벨라였다. 다른 노예들처럼, 이사벨라의 어린 시절도 열악한 주거 환경, 중노동, 채찍질, 가족들이 생으로 찢겨 이리저리 팔려 나가는 단말마의 고통으로 점철돼 있다. 작가 조이 첸은 이사벨라의 강인한 힘과 풍모, 또 그 모든 능력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신과의 영적 교감의 드라마를 사실적이고도 연극적으로 그려 나가고 있었다.

이실은 개인의 관심사를 사회화시켜 낸 조이 첸이라는 작가에게 연대감을 느끼며, 미래에 대한 설렘에 사로잡힌다. 이실과 예국희가 캐스팅에 의견 일치를 본 배우는 오데레사 선생이다. 데레사 선생은 예진호 연출의 '아가멤논 '81'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 역할을 맡아, 숨죽인 채 빨려 들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 냈었다. 딸을 제물로 바친 남편을 저주하는 대사들을 내뱉으며 걸어나온 휑하게 뚫린 두 눈, 어깨에서 발등까지 늘어뜨려진 은빛의 헝겊 오라기들, 그 사이로 형형히 돋아난 두 개의 젖가슴. 창백한 외피 속에 가득 찬 뜨거운 에너지에 눈이 멀어 버릴 듯한 장면이었다. '트루스의 젖가슴' 8장에서 주인공 소저너 트루스가 그녀가 남자일 거라고 억지 주장을 펴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자신의 검은 젖가슴을 청중들 앞에 드러내 보이며 "댁들도 내 젖을 먹고 싶으시오?"란 대사를 뱉는 장면은 이실과 예국희로 하여금 그 옛날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데레사 선생을 불러오게 만든다.

그러나 긴 공백 기간을 접고 나타난 데레사 선생은 그녀들이 기억하던 우상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연습장 안에서의 선생의 거동은 너무도 산만해서 연습이라 이름 붙이기조차 낯뜨거울 지경이었다. 이실은 데레사 선생이 나이 어린 연출가인 자신을 무시하고 선생 자신의 해석대로 극을 끌고 나가려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 데레사 선생은 오랫동안 자신을 모성 속에 가두는 배역들을 기피해 왔다. 그런데 이번엔 배우로서의 직감이 기이하게도 이사벨라의 모성을 향해 격렬하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녀에겐 17년 전에 두고 온 딸이 있다. 사련에 눈이 뒤집혀 남편도 자식도 버린 음탕하고 집안 말아먹은 여자 취급을 받으면서, 그녀의 마음이 가장 필요로 했던 건 무엇보다 새로운 자신을 받아들이는 거였다. 이혼한 뒤 그녀는 연습이 없는 날마다 따뜻한 품을 가진 그 남자를 기다렸다. 너무나 짧았지만 너무나 좋아서 자꾸 그리워지는 중독된 사랑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지나가 버린 이제, 그녀는 딸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 주고 싶었다.

이실과 예국희가 작품의 클라이맥스라고 간주하는 8장의 젖가슴 장면이 데레사 선생에겐 연극이길 포기한 교조적 설정으로 여겨졌다. 8장에 대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다 선생은 급기야 작품 전체에 거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실과 선생의 관계에 국한된 것처럼 보였던 갈등이, 작품 자체에 대한 피곤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공연이 점점 다가오는 가운데 이실에게 선생이 연습을 망치는 원흉으로 굳어져 갈수록, 선생에겐 이실이야말로 작품을 망쳐 먹는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예국희와 이실은 작품의 진정한 방향을 흐릴 수 없다는 확신에 데레사 선생에게 마지막 선택을 요구한다. 선택의 기로에 선 데레사 선생은, 이실만이 앉아 있는 객석 앞에서 자신의 트루스에겐 젖가슴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선생을 부축하여 집까지 바래다준 이실은 거실 오디오에 꽂힌 테이프에 녹음된 데레사를 부르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젊은 시절 그녀에게 바쳐졌을 그 사랑의 노랫소리는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거늑한 술잔 같은 목소리였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르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도 그것은 녹이 슬지 않았다.

⊙ 작품 세계
이 작품의 구도는 소저너 트루스라는 역사적인 여성 인물의 이야기를 무대에서 재현하려는 예국희(38), 이실(34), 오데레사(52)와 그들의 삶을 둘러싼 관계 맺기의 이야기이다. 기획자, 연출가, 배우로서 그들은 소저너 트루스라는 무대 인물을 만들어 가면서 자신들의 꿈과 악몽과 열정을 각각 그 인물에 투사하여 담아 내려 한다. 그것이 세 주인공들이 소저너 트루스와 관계하는 방식이다. 그 세 명의 꿈과 악몽과 열정이 무대 위의 소저너 트루스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여 가면서 그녀들은 필연적으로 관계 맺기의 장을 만들어 가게 된다. 또한 그녀들 각자가 쌓아 온 공간과 시간의 역사들, 분명하거나 불분명하게 각인된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끄집어내어진다. 소저너 트루스라는 거울을 통해 드러난 여성들의 다양한 진실들은, 그들의 관계 맺기를 해결해 가는 열쇠이자 동시에 '트루스의 젖가슴'이란 연극을 완성하게 만드는 질료인 것이다. 이 세 명의 여자들은 점점 더 희곡 속 주인공의 눈부시고 강인한 각각의 면모들을 나름대로 자기화하면서 더불어 성장하고 닮아 간다.

이실은 삼십대에 접어들도록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연극을 통해 예술적 인정도 생활의 안정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이 작품에 사회적 자아의 사활을 걸게 되고, 소저너 트루스의 용기와 도전성에 깊숙이 매료되어 동일화되어 간다. 예국희는 소저너 트루스의 영성과 당당함에 경도되어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상처를 갖고 있다. 여배우였던 어머니는 남편과의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이십 대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존재로 기억된다. 예국희는 어머니의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박 관념처럼 뿌리내려져 있다. 오데레사는 오랜만의 컴백 작품을 통해 지난날의 관록과 연기자로서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 보여야 할 절박한 조건에 놓여 있다. 그녀는 오랜 무대 경험으로 숙련되고 날카로워진 배우적 통찰력으로 이 작품을 자신의 잣대로 변형시키려는 시도를 하며, 나이 어린 연출가를 소외시켜 버린다. 17년 전 딸을 두고 나와야 했던 과거를 보상하려는 심리가 얽혀 있는 그녀의 초점은, 소저너 트루스의 모성적 위대함에 사로잡힌다.

또한 그녀의 육체가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상처, 그 진실이 결정적으로 이실이나 예국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하게 하는 전제가 된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 육체의 진실은 그녀들 모두에게 화해와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아픈 비밀을 함께 껴안게 되는 것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생의 진실과 이면에 대한 한 편의 알레고리가 되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다.

작가의 말 ... 5

배우의 집 ... 11
유진 오닐의 어머니 ... 18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때 ... 28
결단 같은 건 하는 게 아니다 ... 36
클리타임네스트라 ... 45
전쟁의 시작 ... 57
벨라, 이사벨라 ... 66
정말 뜨거운 감자 ... 68
닐 사이먼이 본다면 ... 79
동트기 전에 떠나가라 ... 89
소리 없이 가버리면 안 된다 ... 93
성우들이 왔던 일 ... 103
두 배로 갚아 주소서 ... 112
그녀가 남편을 죽인 이유 ... 118
오늘도 내 잘못인가 ... 127
무서운 기도는 빨리 이루어진다 ... 139
마음은 밤에도 쉬지 못한다 ... 145
배우가 연출을 거부하면 ... 158
연출은 배우를 바꿀 수도 있다 ... 167
소저너, 소저너 트루스 ... 177
길이 있으니 시작했겠지 ... 183
불감증을 고치는 법 ... 195
난 여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 217
어디로 갔을까 ... 222
댁들도 내 젖을 먹고 싶으시오? ... 229
죽느냐, 사느냐 ... 232
아무도 죽을 수 없는 이유 ... 251
데레사의 젖가슴 ... 260
고엽 ...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