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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늠할 수 없는 억겁의 사랑 그리고 꿈

1931년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S. 벅의 장편소설 『만다라』. 근현대 격동기의 인도에서 국적과 신분이 다른 네 주인공이 운명적으로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또한, 작품의 공간배경인 인도를 신비화하지 않고 변화무쌍한 세계 일반을 보여주면서 궁극적으로 인간 보편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소설은 정통적인 전사의 후예이면서 식민지 시절 기지 있게 영국 정부와 원활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던 라지푸트족의 혈통인 자가트 왕자와 부인 모티, 먼 서방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 인도로 떠나온 미국 여자 부룩, 인도 안 소수민족인 빌 족의 인권과 현실개선에 앞장서는 영국인 성직자 프란시스 폴 신부 등 네 주인공의 사랑과 갈등, 좌절과 꿈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완역판〉

▶시대 안에서 호흡하는 펄 벅의 후기작, 국내 최초 번역·완간

‘인간의 향기, 펄 벅 시리즈' 기획을 통해 《연인 서태후》《북경의 세 딸》《열두 가지 이야기》 등 펄 벅의 미공개 작품을 한국 대중에게 알려온 도서출판 길산이 또 다른 펄 벅 작품을 들고 나왔다. 국내에서 최초로 번역, 완간되는 장편서사소설 《만다라》가 그것.
감각적이고, 적당히 자폐적이며, 헐거운 서사 대신 자유분방한 개인주의가 돋보이는 요즘의 번역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펄 벅의 소설은 빛나는 서사와 더불어 시대와의 갈등을 중심축에 놓으면서 인물들의 사랑, 이상, 좌절, 가치관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만다라》는 펄 벅의 후기작으로, 근현대 격동기에 있는 인도에서 국적과 신분이 다른 네 주인공이 운명적으로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그린다. ‘밀교에서 발달한 상징적 형식들을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란 뜻의 만다라는 이미 정신분석학의 대석학인 구스타프 융이 무의식의 원형을 비추는 거울로 파악함과 동시에 치료책으로 적극 응용하기도 했는데, 소설 속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의미가 확장된다. 즉 ‘조직적으로 배치된 우주의 상징으로서 주로 기하학적인 모양의 동심원 조직이 특징이며, 각 형태는 신의 형상이나 속성을 담고 있다. 이 상징은 자아를 재통합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소설은 궁극적으로 ‘나와 타자의 영원한 합일’을 이야기하면서 불교의 환생 이론을 차용한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현학적인 의미해석이므로 바통을 평론가에게 넘긴다.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그 안에서 생생히 살아나는 인도의 역사

《만다라》는 정통적인 전사의 후예이면서 식민지 시절 기지 있게 영국 정부와 원활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던 라지푸트족의 혈통인 자가트 왕자와 부인 모티, 먼 서방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 인도로 떠나온 미국 여자 부룩, 인도 안 소수민족인 빌 족의 인권과 현실개선에 앞장서는 영국인 성직자 프란시스 폴 신부 등 네 주인공의 사랑과 갈등, 좌절과 꿈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번왕국(인도의 독특한 토후국)에서 중앙집권 체제로 나아가는 인도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자가트는 왕족의 권위를 과감히 버리고 대대손손 유지해온 궁전을 호텔로 개조하는 사업에 뛰어든다. 어느 날 외아들을 중국전쟁에서 잃게 되고,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왕비가 자가트를 전쟁현장에 보내어 아들의 행방을 찾도록 요청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여정 중에 ‘진실 그 자체인 현재’를 찾아 홀로 인도를 여행하는 미국 여자 부룩을 만나는 자가트. 이 이방 여자에게서 그는 생애 최초로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뜬다. 약속된 혼인, 이른바 정략결혼을 한 그는 평소 자신이 왕비를 사랑한다고 믿어왔지만 그것은 의무적인 사랑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불현듯 깨닫는 것이다. 자기주관이 뚜렷한 부룩과의 예기치 않은 사랑은 비린내 나는 사춘기적 사랑이 아닌 존재에 눈을 뜬 사랑임을 그는 고백하는데…. 비단 자가트뿐 아니라 왕비 모티도 폴 신부와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자유연애의 환상을 꿈꾸지만 좌절되고 만다. 여기에 인도의 근현대사가 오묘하게 결합되면서 소설은 단순히 사랑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리얼리즘적 서사로 나아간다.


악바르 황제, 타지마할 궁전, 맥마흔 라인, 중국과의 전쟁, 고아Goa 지방 탈환

예컨대 무굴제국을 호령한 악바르 황제의 영광,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묘라 알려진 타지마할의 역사, 조선의 논개를 연상시키는 파드미니 왕비, 라나 상가, 인도의 많은 번왕국과 영국 사이의 역학관계(알력) 등 인도의 근대사를 소설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맥마흔 라인’이나 ‘티베트’ 같은 민감한 지리적 배경에 의해 발생하는 중국과의 국경전쟁, 인더스문명의 발상지에서 한 몸으로 탄생한 파키스탄이 이슬람국가로 독립하면서 겪는 국경분쟁, 네루 수상과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끌어낸 ‘포르투갈로부터의 고아Goa 지방 탈환’ 등 인도 현대사를 창조적으로 끌어안는다. 이는 편집자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시대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었던, 영원한 현재인인 펄 벅의 사상과 세계관의 투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국제정세에 민감했던 펄 벅은 특유의 역사적 심미안으로 당시 인도의 시대적 상황이나 주변국과의 관계 등을 《만다라》에 생생히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특히 자가트의 외아들인 자이가 왕족의 신분임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 앞장서서 중국과의 전쟁에 참전하는 대목은, 반핵·반제국주의·반인종차별 운동 등 거침없이 사회문제에 투신했던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펄 벅과 오버랩된다.


▶인간적 욕망, 사회문제에 적극적이었던 펄 벅의 인생관 투영, 캐릭터들의 향연
오리엔탈리즘을 벗고 보편을 노래

펄 벅은 제 세계관과 애정관을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내기도 된다. 가령 자신을 둘러싼 속물적인 세계-미국의 주류세계를 암시-를 냉소함으로써 스스로 방랑자가 된 부룩이 극도로 망설이다 어렵게 손을 내밀자,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어디에도 열쇠는 없어요”라고 한 자가트의 말은 비단 이 두 인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이는 국적을 뛰어넘어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원하고, 실천하려 애썼던 펄 벅의 가치관이 단문으로 요약된 것이리다. 또한 부룩의 할머니를 통해 “사랑할 능력을 잃으면 심장은 죽는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일생 동안 사랑에 목말라 하고, 중국의 시인을 비롯하여 하버드대의 노 철학교수, 텔레비전 제작자, 근본을 알 수 없는 댄스 강사 등 수많은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던 펄 벅의 솔직한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렇듯 《만다라》는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아본 자의 후기작답게 그녀의 완숙한 통찰력과 솔직한 고백이 압권인 작품이다. 거기다 그녀의 다른 소설들이 그렇듯 잘 짜인 서사와 시대에 얽매이지 않는 구성, 등장인물들의 리얼한 캐릭터 등도 《만다라》를 읽는 재미다. 예를 들어 전통과 현대의 충돌지점에서 시대정신에 따라 과감히 옷을 갈아입는 자가트, 그에 반해 체제에 안주하길 원하는 모티, 성직자임에도 정신수양보다는 약자들의 인권과 현실 개선에 앞장서는 프란시스 폴 신부, 거칠 것 없이 맹목적으로 사랑에 뛰어들지만 종국에는 연인의 원대한 꿈을 위해 내세의 사랑으로 완결짓는 부룩 등 각각의 캐릭터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세속적이면서 숭고하게 넘나들면서 ‘갈등하는 인간’의 면모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한편 펄 벅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대지》나 시대의 등불이면서 동시에 희대의 악녀란 극단적 평가를 받는 서태후를 매력적인 여걸로 재탄생시킨 《연인 서태후》 등이 중국을 배경으로, 중국의 황실과 중국 민중의 삶을 다루었다면 《만다라》는 인도의 왕실과 서방에서 온 현대인의 만남을 그린다. 역시 동서양의 조우다. 40여년 동안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인으로 체화한 펄 벅이 《대지》나 《연인 서태후》를 서양인의 시각인 ‘오리엔탈리즘’으로 왜곡하지 않고 중국 그대로의 모습을 그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만다라》에서도 작품의 공간배경인 인도를 신비화하지 않고 변화무쌍한 세계 일반을 보여주면서 궁극적으로 인간 보편의 삶을 노래한다. 실제로 그녀는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였으며, 그곳에서 중국의 풍경 나아가 아시아의 풍경을 보았고, 당시 여 수상이던 인디라 간디를 만나 카스트문제와 빈곤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편집자 서문-이 책을 처음 읽는 분들에게
인도는 어떤 나라?

제1부
굴뚝새 한 쌍이 시계 안에 둥지를 틀 때
사랑이 변하지 않으리라 믿기에 여자는 슬프다
호수 궁전 그리고 짙은 녹색의 나무들
보석을 두른 살아있는 봉건제도의 화석
폴 신부와 왕자 내외의 저녁식사
원칙을 누리는 사람과 지켜주는 사람
자가트, 근대를 넘어 현대를 껴안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피아노 선율과 함께 나타난 이방인
고결한 여인이 비참하게 매달릴 때
일찍 도착한 방문객

제2부
사랑할 능력을 잃으면 심장은 죽는다
거울 속 그리스 소녀에게서 자신을 보다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어디에도 열쇠는 없다
네 사람의 만찬, 미묘한 불협화음
예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것 같은…끌림
우연히 민감한 자리에 놓일 때

제3부
오만한 내면과 차가운 영혼에 빠지다
청춘들, 비라와 버트
재회,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현자에게서 환생이야기를 듣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부도덕도 순수하나요?
장밋빛 공단 옷 가지런한 슬리퍼
도둑맞은 샌드위치
고백하나 운명의 사슬에 걸리다
내 손수건을 써요, 아름다운 옷이 망가지잖아요
자이의 유품과 새 아기
폴 신부, 위대한 사랑을 논하다
타오르는 불빛 한가운데서 평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