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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네 고만물상>, <틴에이지>, <사랑스러워>의 작가 가와카미 히로미의 감성 소설집.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의 사랑, 고통과 비극을 가져오는 집착을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표제작 <빠지다>를 포함해 <포슬포슬>, <거북이가 운다> 등 8편의 단편은 여덟 가지 색깔과 여덟 가지 향기로 이루어진 짧은 사랑 이야기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장난기와 애잔함, 격렬함과 메마름 등 여러 요소가 어루러지며 펼쳐져 나간다. 양장제본.

「사람이 사람을 강요하고 사랑이 사랑을 부추기는 습하고 서늘한 감성 소설집」

가와카미 히로미의 《빠지다》는 여덟 개의 단편 가운데 두 번째 글의 제목이다.
사람이든 사람 사이의 관계든 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든 간에 삼라만상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해되는 게 아니라 기가 막혀지고 억장이 무너져 내리기 마련이다. 이러한 진실을 고스란히 집어내는 그녀만의 문학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해주는 듯한 제목 ‘빠지다.’

가와카미 히로미는 자기 작품의 등장인물 속에 잠입하여 일상과 비일상의 여기저기를 분주하게 들쑤시고 다니며 독자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우리는 그녀의 글을 대하며 먼지를 떨어내고 빗질과 걸레질을 해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어질러지고 수고와 고단함이 더해지며 나와 또 다른 나의 끝나지 않는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
《빠지다》 안에서 무엇을 찾아내고 어떻게 헤어 나오는지는 오롯이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솔직하게 써내려간다. 주어진 것이든 선택한 것이든, 도망치는 주체도 우리 자신이며 갇혀 있는 주체도 우리 자신임을 사랑과 섹스라는 주제가 담긴 짧은 글 안에서 표현해내고 있다.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의 사랑, 고통과 비극을 초래하는 집착을 조심스럽게 갈아서 먹으로 만들어 가와카미 히로미만의 붓을 들고 칠해가고 있는 《빠지다》.
자기 자신을 달래기 위한 심호흡을 길게 내뱉고 나서 작품 하나하나 속으로, 그 하나하나의 어우름 속으로 빠져보자.

1. 포슬포슬
2. 빠지다
3. 거북이가 운다
4. 가여운可哀想
5. 칠면조가
6. 백 년
7. 신충神蟲
8. 무명無明

1. 포슬포슬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까요? 어두침침한 공간으로 점선처럼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포슬포슬 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은 아마 길섶 풀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일 것이다. 언젠가 어딘가가 나오겠죠. 곧 날도 밝을 테고요.(p.25~26)
2. 빠지다
얼마 전부터 도망치고 있다.
혼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둘이서 도망치고 있다.
도망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도망치고 있는 지금도 왜 도망치고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도망치기 시작했으니 계속 도망치는 것이다.(p.31)
3. 거북이가 운다
사흘 후, 유키오 씨는 나갔다.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거북이에게는 한 번 먹이를 주었다. 거북이는 가끔 운다.(p.71)
4. 가여운可哀想
나카자와 씨에게 꼭 붙어 그가 잘 걷지 못하게 했다. 무서워서, 꼭꼭 붙어 있었다. 가여워. 모두 다 가엽지. 나카자와 씨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놀이공원은 밤이 되어도, 영원히 밝았다.(p.92)
5. 칠면조가
“커다란 칠면조가, 가슴 위에 올라탄 기억이 말이야.”
하시바 씨는 불현듯 자세를 고치고 말했다. “그런 기억이 말이야, 분명히 있어.”
칠면조요? 되묻자, 하시바 씨는 칠면조, 하고 진지하게 끄덕였다. “나카다의 작은어머니 댁으로 매년 여름에 며칠씩 묵으러 갔거든. 거기서 그랬어. 칠면조가 올라탄 거야.”(p.95)
6. 백 년
죽은 지도 한참이다.
사카키 씨와 같이 죽을 생각이었다. 한데 사카키 씨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나만, 죽었다. 죽고 난 다음에는 구천을 떠돌기도 하고, 절절한 마음에 유령으로 나타나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해보았지만 이제 더는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사카키 씨를, 깊이 그리워할 뿐이다.(p.119)
7. 신충神蟲
어느 남쪽 지방 산간에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귀신을 잡아먹는 벌레였다. 여덟 개 달린 다리에는 커다란 발톱이 나 있다. 그 발톱으로 귀신을 움켜잡고 머리부터 아작아작 씹어 먹는다. 아침에 삼천 명, 저녁에 삼백 명 잡아먹는다. 크게 벌린 벌레의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죽 박혀 있고, 잡아먹힌 귀신들의 피로 입 주위는 늘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p.153)
8. 무명無明
택시가 발광하는 것 같다. 도우타 씨의 콧등의 피가 솟아나 방울졌다. 저기요, 다시 한 번 불렀지만 그는 잠들어버렸다. 슈우우, 한숨 같은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그의 코털을 싼 휴지를 손에 꼭 쥐고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았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백조도 수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p.186)